어머니와 장모님이 더 그리운 추석

오풍연 | 기사입력 2019/09/12 [10:57]

어머니와 장모님이 더 그리운 추석

오풍연 | 입력 : 2019/09/12 [10:57]

올 추석은 쓸쓸하다. 한 분 남았던 장모님마저 돌아가셔 찾아볼 어른이 안 계시다. 집안에 어른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손들도 더 자주 만난다. 어른 중심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특히 어머니와 장모님이 그리운 분이다. 어머니는 2008년 12월 돌아가셨다. 그리고 장모님은 지난 달 22일 세상을 떠나셨다. 두 분은 살아계실 때 가깝게 지내셨다.

대전 어머니 얘기는 한 두 번 했던 것 같다. 정말 자애로운 분이셨다. 자식들 일이라면 모든 것을 헌신했다. 우리 5남매 뒷바라지를 위해 막노동도 하셨다. 때문에 우리가 대학 교육까지 마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셨던 분이다. 어머니와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고향인 충남 보령시 청라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대전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3년 후 중학교 2학년 때 큰 위기를 맞았다. 우리 집안의 기둥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숙직을 하시다가 연탄가스를 마셔 돌아가셨다. 어머니 나이 42살 때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우리 다섯 남매를 혼자 키우셨다. 여자의 몸으로 농사도 짓고, 허드렛 일을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대셨다. 남자였다면 불가능했던 일을 해내셨던 것이다.

나는 딱 중간이었다. 위로 누이와 형님이 있고,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공부는 내가 가장 잘한 편이었다. 대전으로 유학을 간 것도 대전고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가라는 당부이셨다. 아버지는 내가 대전고에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셨다. 대전고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학생들이 몰려왔다. 내 성적은 중간 정도.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생전의 아버지는 내가 법대에 가기를 희망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결국 1년 재수를 한 뒤 철학과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둘째인 내 자랑을 하셨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다들 선망하던 직장에도 들어갔다고 그러셨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 있고, 어머니는 대전에 계셔서 자주 볼 수가 없었다. 1년에 서 너 차례 뵈었다고 할까. 설과 추석, 아버지 제사 때는 빠지지 않고 내려갔다. 평소에는 바쁘기도 했지만, 또 시간이 많지 않다는 핑계를 댔다. 대신 전화는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빠짐 없이 했다. 그것으로 작은 위안을 삼았다.

어머니보다 장모님과 보낸 시간이 훨씬 많다. 1993년 2월부터 2019년 8월까지 함께 지냈으니 만 26년 6개월을 모셨던 셈이다. 장모님이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다. 장모님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위인 나를 더 챙기셨는지도 모른다. 장모님이 쓰시던 방을 보면 더욱 생각난다. 금방이라도 방에서 “오서방” “인재 아범”하면서 나오실 것 같다.

이번 추석은 세종에 내려가지 않는다. 형님께도 양해를 구했다. 장모님 수목장을 한 양주 장흥에 간다. 나무에 매달아 놓을 푯말도 준비했다. 일본에 사는 처제도 어제 들어왔다. 장모님 49재는 10월 9일 끝난다. 생과 사는 순간이다. 두 분이 보고 싶다.

▲     © 오풍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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